내 이름은 몹시 금속성이다. 한글로도 전혀 예쁜 이름이 아니고 사람들이 내가 남자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차갑고 남성적인 이름이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두 번 이상을 말해주어야 사람들이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발음이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아마 여자 이름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뜻밖이라서 그렇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런 불평을 언젠가 서울대학교 성굉모 교수님께 했다가
"이 사람아, 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열 번씩 불러줘"
그 날 이후로 알아듣기 어려운 이름이라는 데에 대한 불평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많은 한국인 중국인들이 이 곳에서 영어 이름을 가지는 이유는 고유의 이름이 발음하기도 어렵고 기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난 영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일단 내 이름을 영어로 옮기면 그들은 그게 남자 이름인지 여자 이름인지 전혀 알 수가 없고 다른 이름들에 비해서 발음이 어려운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쇠금자가 두 개나 들어가는 금속성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지만 출장 온 중국 사무소의 친구들이 내 이름을 한자로 적어줬을 때 너무 strong 하다고 이름을 바꾸는 게 힘들면 좀 부드러운 이미지의 영문이름이라도 생각해 봐라며 충고하기까지 했는데 (그 날 이 친구들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내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려고 애쓰고 있었음. 주로 릴리같은 꽃 이름으로.)
심지어 같은 사무실의 친구들도 영문이름을 추천하기 시작한다.
유진이라는 녀석은 단지 H로 시작한다는 이유로 헨리에타...뭐야? 19세기냐?
앤디는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추천
"야, 내가 제이슨같이 생겼냐?"
"아니"
"그런데 왜 제이슨이야? 남자 이름이잖아!!!"
"너 한글로도 남자이름이니까 웬지 제이슨이 어울릴 것 같아서..."
사실 내가 영문 이름을 필요로 하는때는 샌드위치 주문할 때밖에 없는데 줄리아 로버츠를 사용했다가 한 시간만에 주문한 음식을 받아들고는 다시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
그러다가 지난 금요일 자료를 찾기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했다. 딱 적당한 이름을.
Maximum Length Sequence System Analyzer
약자로 MLSSA라고 쓰고 멜리사라고 읽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잠시 가져봤다.
MLS는 유사 랜덤 시퀀스로 시스템의 특성을 측정하는 광대역 신호로 오랬동안 사용되어 왔다. 지금처럼 로그첩 신호가 새로운 유행이 되기 전까지.
이 MLS 신호를 이용해서 전기음향 측정을 하는 장비의 이름이 MLSSA이고 DRA Lab이라는 곳에서 만들어 팔아오고 있다.
그 회사 웹싸이트를 가보면 대체 장사를 할 생각이 있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로 황량하기는 한데 이 시스템이 윈도우 콘솔에서 돌아간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장비는 사운드카드와 윈도우용 (정확하게는 콘솔용) 소프트웨어.
사운드카드의 ADC 성능은 제법 좋다. 153kHz에 이르는 샘플링주파수를 갖고 있기까지 하니.
MLS 신호를 출력시키고 마이크로 들어온 신호와 크로스코릴레이션을 해서 시스템의 전달함수를 구해주는 이 장비는
20년 전의 컴퓨터 기술을 생각해본다면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 틀림없었다. 386/486 같은 시스템에서 돌아갔을 테니까.
CPU의 속도가 지금같지 않고 느려터졌던 시절에 실시간으로 임펄스와 주파수 응답특성을 보여주는 그 기술은 MLS라는 신호의 놀라운 특성에 의해 가능했다. 자기 자신과 크로스 코릴레이션을 했을 때 임펄스를 뽑아내는 MLS는 다른 브로드밴드 신호보다 훨씬 간단하게 임펄스 응답특성을 계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파수변환마저도 매우 간단했다. MLSSA는 시간 영역과 주파수 영역을 넘나드는, 시스템의 특성을 규정하는 모든 수학 모듈을 갖고 있었다.
MLSSA를 처음 본 건 전직장에서였다. 입사하자 마자 장비의 사용법을 배우고 측정하는 것들을 배웠다.
윈도우에서 돌아가는, 시대에 발 맞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만든 새 장비 Clio를 도입하기 전까지 나는 MLSSA를 붙들고 수 많은 측정을 했다.
그 때는 윗사람에게 모질게 시달리면서도 동료들과는 결속을 다져가던 시기였는데 MLSSA와 그 시절의 기억은 언제나 붙어다닌다.
그리고 신입사원들이 들어오고 그러면 또 그들에게 MLSSA 사용법을 가르쳐주고...
지금은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져가는 장비 - MLSSA
(그러게 왜 윈도우 버전 개발을 안 하는 것이냐고)
돌이켜보면 그 때가 내게는 가장 지식을 많이 습득하고 진짜 중요한 것들을 배운 시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밥벌이를 하게된 밑바탕이 된 시기이기도 했다. 악취나는 무향실에서 밤 늦게까지 측정 강행군을 같이 하던 김책임님... 저질 체력이라 무거운 것을 늘 김책임이 들기만 하니 늘 미안했다. 근데 우리 측정 샘플은 왜 이렇게 무거운게 많냐고. 서브우퍼에 플라즈마 텔레비전에...우리와 무향실을 함께 쓰던 진동소음측정 팀의 사람들은 반무향실이 필요해서 항상 바닥에 철판을 깔고 측정을 했다. 우리 차례가 되면 그 철판들을 바깥으로 치워야 하는 게 골칫거리였다. 원래 이전에 사용했던 사람들이 치워주는 게 원칙이나 안 치울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김책임과 나는 그 철판까지 들어서 옮겨야만 했다. 나는 항상 MP3 플레이어, 휴대폰같은 가벼운 거 하고 싶다고 툴툴거렸다. 멜리사는 내 젊은 날의 추억이며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동료애의 매개체였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다가 멜리사로 측정한 그래프를 발견하면 그 시절을 떠올리고 그 동료들을 떠올린다. 지금 일하는 곳엔 멜리사가 없다.
세월이 지나서 하루에 세 번씩 혼자서 부팅을 하던 불안정한 윈도우 XP가 가장 안정적인 윈도우 OS가 되고 비스타가 지나가고 윈도우 7이 나왔다. 멜리사는 아직도 콘솔에서 돌아갈까? MLS는 이제 지나간 유행이 되었고 로그 스위핑을 하는 정현파 신호가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로그첩이라고 부르는 이 신호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MLS보다 신호대 잡음비가 3dB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모닉 디스토션도 단 한 번에 측정해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CPU 기술의 발전일 것이다. 로그첩을 이용해 임펄스 응답을 구하려면 원 신호의 역함수를 구해야만 한다. 사인 스위핑 함수의 역함수를 실시간으로 구하고 또 실시간으로 컨벌루션을 하는 것은 20년전에는 힘들었을 것이다. PC는 기껏해야 486, 마이크로프로세서도 모토롤라 68000 정도였다. 파워PC가 93-4년께 등장했지만 고가의 CPU였고 DSP는 디지탈 신호 처리의 약자였지 연산을 빨리 하는 마이크로칩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서 어떤 복잡한 수학적 계산도 무지무지 빨리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로그첩의 역함수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역함수도 구할 정도로 빠른 디지탈 프로세스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 디지탈 기술이 비닐 레코드의 시대를 퇴장시키고 CD 시대를 열었으며 압축코딩의 기술과 광대역 네트웍의 기술이 CD 시대를 퇴장시키고 디지탈 다운로드의 시대를 연 것처럼 음향기술자들에게는 MLS의 시대가 가고 로그첩의 시대가 왔다. 이미 이 바닥에는 오랫동안 거들떠보지 않았던 싸인함수를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유행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 역시 이탈리아에 있는 안젤로 파리나라는 교수가 열심히 학회를 돌아다니며 논문을 발표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MLS에서 로그첩으로 스위칭을 했다. 전직장에서도 그랬고 지금 있는 회사에서도 그랬다.
그렇다고 MLS가 아주 쓸모없어졌다거나 아주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많은 측정 장비들이 여전히 테스트 신호로 싸인함수를 쓸 건지 MLS를 쓸 건지 물어보지만 멜리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멜리사는 장비 자체가 MLS에 기반하고 있다. 그 시절 로그 싸인이나 스텝싸인으로는 임펄스를 구할 수 없었다. 실시간 FFT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밴드별 필터에 광대역 노이즈를 집어 넣어서 분석을 하는 타임도메인에 기반한 RTA장비들을 사용했다. RTA의 밴드 필터는 고주파로 갈수록 밴드폭이 넓어서 에너지가 증가하기 때문에 화이트 노이즈를 집어넣으면 주파수 응답특성이 지수함수 모양으로 나온다. 그래서 응답특성이 평탄하게 나오는 핑크 노이즈를 썼다. 그것보다 정밀한 주파수 응답특성을 원하면 스텝싸인을 사용해서 각 싱글톤에 대한 레벨만을 기록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측정은 순전히 크기만을 측정하기 때문에 페이즈 특성은 포기해야 했다. 주변 노이즈에도 취약했다.
멜리사는 이런 시기에 등장했다. 내게 시스템 전달함수의 경이로움을 보여준 최초의 장비였다. 그래서 결정한다. 이미 내 친구들은 내가 새로운 영문 이름을 쓰겠다고 하면 익숙해하지 않을테니 샌드위치나 커피를 주문할 때 쓰자.
MLSSA라고 쓰고 멜리사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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